참고로 흔히 ‘훈민정음’이라고 할 땐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1443년 세종이 직접 창제한 우리나라 글자를 이르는 것으로, ‘한글’로 불리기 전의 원래 이름이다. 다른 하나는 3년 뒤인 1446년 반포할 때 펴낸 책 이름으로서의 《훈민정음(해례본)》이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돼 비로소 세상 빛을 봤다. 우리나라 국보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간혹 이를 오해해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 즉 한글이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착각하는 이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훈민정음(해례본)》 책이 지정된 것이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각 글자를 어떻게 불렀는지 알려진 게 없었다. 우리 글자가 이름을 얻은 것은 해례본이 나온 지 80여 년이 지난 1527년 《훈몽자회》를 통해서다. 당시 역관이자 한학자이던 최세진이 한자 학습서를 펴냈는데, 이 책의 앞부분 ‘범례’에 ‘諺文子母(언문자모)’라는 제목으로 훈민정음 글자의 이름이 나온다. “ㄱ其役, ㄴ尼隱, ㄷ池末, ㄹ梨乙, ㅁ眉音, ㅂ非邑, ㅅ時衣, ㅇ異凝….”(ㄱ기역, ㄴ니은, ㄷ디귿, ㄹ리을, ㅁ미음, ㅂ비읍, ㅅ시옷, ㅇ이응.) 자음과 모음 이름을 한자 음과 훈을 이용해 표기했다. 우리말을 올곧게 떨쳐 일으키는 데 평생을 바친 정재도 선생이 탄복했던 ‘ㄹ’도 비로소 ‘리을’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태어난 뒤 600여 년 가까이 달려온 한글 자음 ‘ㄹ’의 설명은 이제 한결 구체화됐다. 좀 쉽게 풀면, ‘ㄹ’은 혀끝을 잇몸에 가볍게 댔다 떼면서 내는 소리다. 또는 잇몸에 댄 채 공기를 그 양옆으로 흘려보내면서 내는 소리다. ‘흐름소리’라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국어 자음 중 모음에 가장 가까운 음향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ㄹ’과 관련된 규칙적 음운 현상은 규범에도 반영돼 있다. 두음법칙이 대표적이다. 이는 한자어에서 첫머리에 ㄹ이 오는 것을 피하는 규정이다(한글맞춤법 제11, 12항). ‘량심(良心)→양심, 렬차(列車)→열차’, ‘래일(來日)→내일, 락원(樂園)→낙원’처럼 머리음 ‘ㄹ’을 ‘ㅇ’이나 ‘ㄴ’으로 바꾸는 것이다. 끝소리가 ‘ㄹ’인 말과 다른 말이 어울릴 적의 변화는 맞춤법 제28항(‘바늘질→바느질, 딸님→따님’), 29항(‘이틀날→이튿날, 술가락→숟가락’)에 담겼다. 또 발음할 때 ‘ㄴ’이 ‘ㄹ’의 앞이나 뒤에서 [ㄹ]로 바뀌는 유음화 현상도 강력한 규칙성과 함께 표준발음법 제20항에 실렸다. 난로가 [날로], 대관령이 [대괄령], 칼날이 [칼랄]로 발음되는 현상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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